계약이 아직 체결되어 있지 않고 계약을 준비·교섭·절충하고 있는 단계에서는 당사자는 언제든지 교섭을 중단하고 계약체결을 포기할 수 있고, 준비단계에서 지출된 비용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각 당사자가 그 위험을 부담하여야 합니다. 다만, 대법원은 “만약 어느 일방이 이러한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대법원 2001. 6. 15. 선고 99다40418 판결 등)고 보아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않았을 비용 상당 손해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A회사와 B회사는 B회사가 이 사건 물품의 제작을 위탁하면 A회사가 그에 따라 제작하여 B회사에게 납품하는 임가공계약을 체결하였고, 개별 납품은 발주서를 통한 개별계약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 물품은 인쇄회로기판에 부품을 부착하여 제조하는데, A회사는 2017. 10.경 부품 수급에 어려움이 생기자 B회사에게 2017년 12월분의 발주물량 예상치를 공유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B회사는 60만개를 예상 수요 물량으로 통지하였으나, 그 다음날 15만개에 대한 정식 발주서만을 교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B회사는 2017. 11.경 A회사가 발주물량을 60만개로 인지하고 이 사건 물품을 제조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A회사에게 추가생산 중단을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A회사는 ① 이 사건 물품 60만개에 대한 개별계약이 체결되었거나, ② 적어도 나머지 45만개에 대한 개별계약이 확실히 체결되리라는 신뢰가 부여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인쇄회로기판 45만개 제작비 상당의 손해배상을 구하였습니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는 B의 예상 수요 물량 통보 행위는 A로 하여금 B의 발주가 이 사건 물품 15만개 외에 추가적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인식할 만한 신뢰를 부여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A와 B의 종전 발주 및 생산 내역에 비추어 15만개의 약 36%에 해당하는 5.4만개를 선 제조 착수에 돌입하였을 만한 수량이라고 보아, B회사가가 A회사로부터 인쇄회로기판 5.4만개를 수령함과 동시에 5.4만개의 원가 상당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조정안을 결정하였습니다.
A회사는 위 조정안을 불수락하고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고, 법무법인(유한)세종은 이 사건의 제1심에서 B회사를 대리하여 ① B회사의 예상 물량 통지는 A회사의 요청에 따른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예상 물량’임이 거듭 강조되었던 점, ② A회사가 나머지 45만개에 대한 정식 발주서의 교부 요청을 한 사실이 없는 점, ③ B회사가 제3의 업체로부터 제작중단 요청을 받은 즉시 A회사에게 제작중단을 요청하였으므로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한 것이 아닌 점, ④ B회사는 A회사가 60만개를 기준을 매입한 부품을 모두 매입하여 소진해 주었으므로 신뢰손해가 없는 점 등을 적극 주장·입증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제1심 법원은 법무법인 세종(유한)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① 이 사건 물품 60만개에 대한 개별계약이 체결되지 않았고, ② B회사가 A회사에게 개별계약의 체결에 관한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였다거나 상당한 이유 없이 체결을 거부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③ A회사는 신뢰이익에 해당하는 손해액의 주장과 증명을 하지 못하였다고 보아, A회사의 손해배상청구를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시사하는 객관적 외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밝혀서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의 판단까지 뒤집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