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1. 영국 상원에 중재법(Arbitration Act 1996) 개정안(Arbitration Bill)이 제출되었습니다. 위 개정안에는 중재판정부에게 사실심리를 생략하는 소위 ‘약식판정 권한(power to make an award on summary basis)’을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재판정부는 청구 또는 청구로 이어지는 특정 쟁점이 실질적으로 인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no real prospect of success) 사실관계에 관한 심리 없이 곧바로 해당 청구 또는 쟁점에 대한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위 개정안은 2024. 7. 4.에 있었던 총선을 앞두고 의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통과되지 못하였으나, 새롭게 구성된 노동당 정부는 최근 상원에 중재법 개정안을 다시 상정하였습니다. 보수당 정부 시기부터 위 개정안에 관한 상당한 검토가 진행되어 온 점을 고려할 때, 의회가 9월 초 휴회기간이 끝나고 복귀한 후부터 남아있는 개정 절차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국 중재법은 중재지를 영국으로 하는 모든 중재에 적용됩니다. 따라서 이미 영국을 중재지로 합의한 기업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기업이라도 앞으로 영국을 중재지로 합의할 경우에 대비하여 위 개정안의 내용을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으며, 이를 감안하여 중재 전략 등을 수립함으로써,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본 개정안에 규정된 약식판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약식판정 권한의 도입 배경 및 목적
가. 약식판정 권한의 의의
전통적으로 중재절차는 당사자가 제기한 청구 또는 쟁점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포함한 모든 주장을 전면적으로 심리(full hearing)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서는 중재판정부에게 ‘약식판정 권한’을 명시적으로 부여하여 중재판정부가 실질적으로 인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청구 또는 쟁점에 대해서는 증거조사와 같은 사실심리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판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우 판정부는 중재절차의 초기 단계에서 사실상 실익이 없는 불필요한 청구나 쟁점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판정을 내릴 수 있게 되므로 절차 진행의 효율성이 크게 증대될 수 있습니다.
나. 약식판정 권한의 명문화 배경
영국의 법원에서는 약식판결(summary judgment)이 오랫동안 판례법으로 확립되어 왔고, 이는 영국 민사소송규칙에도 규정되어 있습니다.1 이러한 법원의 약식판결에 관한 권한은 영국을 중재지로 한 중재절차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묵시적으로 인정되어 왔으며, 특히 몇몇 중재기관의 규칙들에서는 이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재절차에서 실제로 약식판정이 내려진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중재판정부의 소위 ‘적법절차의 준수에 대한 편집증(due process paranoia)’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판정부가 절차적 공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심리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수준의 신중함을 보이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국 중재법 제33조 제1항 (a)목에 따르면 판정부는 중재사건의 각 당사자가 각자의 주장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제공하여야 합니다.3 따라서 판정부가 사실심리를 생략한 채 약식판정을 내리게 되면 패소 당사자로서는 판정부가 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재판정 취소 사유나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 거부 사유로 주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판정부로서는 실질적 근거가 없는 청구 또는 쟁점이더라도 전면 심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약식판정을 내리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 명문 규정 도입을 통한 예상 효과
약식판정 권한이 포함된 중재법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하여 시행될 경우, 중재판정부가 실질적으로 인용의 가능성이 없는 청구 또는 쟁점에 대하여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전면 심리를 생략하고 약식판정을 통하여 신속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중재 절차의 효율성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예상되고, 금융 등 분야와 같이 그동안 중재를 기피해 왔던 분야들에서도 중재를 통한 분쟁 해결이 증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 약식판정 권한의 구체적 내용
가. 절차의 개시
개정안에 의하면 당사자들 간에 약식판정을 배제하는 명시적인 합의가 없는 한 중재판정부는 자신의 재량으로 약식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중재에서의 당사자 자치(party autonomy) 이념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필수적 절차로 규정하기보다는 당사자들간 합의로 그 적용을 배제할 수 있도록(opt out) 한 것입니다.
나. 약식판정의 절차
개정안에서는 약식판정의 절차에 관하여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절차 진행에 관한 일반 조항인 동법 제34조 제1항과 연계하여,4 중재판정부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재판정부가 약식판정을 내리는 경우에는 사전에 당사자들에게 이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5
다. 약식판정의 기준
어떠한 기준으로 약식판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개정안 작성 과정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었으습니다. 그 과정에서 ‘명백하게 근거가 없는 경우(manifestly without merit)’와 ‘인용될 실질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no real prospect of success)’가 가장 유력하게 논의되었는데, 결국은 영국 민사소송규칙과 같이 ‘인용될 실질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no real prospect of success)’가 채택되었습니다.6
위 두 기준은 실무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실제로 상당수 중재기관의 규칙들은 약식판정이 가능한 경우로 청구 또는 쟁점이 ‘명백하게 근거가 없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소송 절차에서 오랜 기간 ‘인용될 실질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약식판결의 기준으로 사용되어 왔고 또 그에 관하여 다수의 판례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후자의 기준이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3. 결론
실무자들은 중재판정부의 약식판정 권한의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영국을 중재지로 한 중재 사건들에서 약식판정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에 관하여 궁금하신 사항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신 경우 언제든지 연락하여 주시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상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Civil Procedure (Amendment No. 3) Rules 2024 (to be entered into force on 1st October, 2024) Part 24 – Summary Judgment.
2 E.g., LCIA Arbitration Rules 2020, Art. 22.1(viii); ICC Arbitration Rules 2021, Art. 22 and ICC Note to parties and arbitral tribunals on the conduct of arbitration under the ICC Rules of Arbitration, paras. 109-114; SIAC Arbitration Rules 2016, Art. 29; HKIAC Administered Arbitration Rules 2018, Art. 43.
3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33(1)(a): “The tribunal shall act fairly and impartially as between the parties, giving each party a reasonable opportunity of putting his case and dealing with that of his opponent”.
4 Arbitration Bill, Clause 7, Section 39A (2): “For the purposes of subsection (1), an arbitral tribunal makes an award ‘on a summary basis’ in relation to a claim or issue if the tribunal has exercised its power under section 34(1) (to decide all procedural and evidential matters) with a view to expediting the proceedings on the claim or issue.” See also Section 34(1) of the Arbitration Act (“It shall be for the tribunal to decide all procedural and evidential matters, subject to the right of the parties to agree any matter”).
5 Arbitration Bill, Clause 7, Section 39A (2): “Before exercising its power under section 34(1) as mentioned in subsection (2), an arbitral tribunal must afford the parties a reasonable opportunity to make representations to the tribunal.”
6 Civil Procedure (Amendment No. 3) Rules 2024 (to be entered into force on 1st October, 2024) Part 24.3: “The court may give summary judgment against a claimant or defendant on the whole of a claim or on an issue if (a) it considers that the party has no real prospect of succeeding on the claim, defence or issue; and (b) there is no other compelling reason why the case or issue should be disposed of at a t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