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분쟁해결 조항(multi-tier dispute resolution clause)이란, 중재(혹은 소송) 절차를 개시하기 전에 당사자 간의 협상, 조정, 전문가 결정 등 대체적인 분쟁해결 절차를 미리 거치도록 하는 조항입니다. 이러한 대체적인 분쟁해결 절차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신속하고 효율적인 분쟁 해결을 가능하게 하므로 실무상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1
한편, 다단계 분쟁해결 조항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슈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문제되는 것은 신청인이 이러한 중재절차 개시를 위한 선행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채 중재를 신청한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재절차가 계속 진행될 수 있는지 또 이를 무시하고 중재판정이 내려진 경우 그 법적 효력은 어떻게 되는지입니다.
본 뉴스레터에서는 위 논점을 더 상세히 소개해 드리고, 실질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어떤 점을 주의하면 좋을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중재개시의 선행요건 불충족에 대한 법적 논거
각국 법원에서는 위와 같은 중재개시의 선행요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사자가 중재를 신청한 경우, 이를 중재판정부의 관할권(jurisdiction)의 문제로 볼 것인지, 청구적격(admissibility)의 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 검토해 왔습니다.
가. 관할권의 문제로 보는 견해
중재개시의 선행요건 충족 여부를 중재판정부의 관할권의 문제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선행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중재판정부가 해당 분쟁을 중재할 권한, 즉 관할권이 없다고 보아 청구를 배척합니다. 그리고 이를 무시하고 중재판정이 내려진 경우에는 이는 중재할 권한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중재판정의 취소 또는 집행/승인 거부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2
한편, 대한민국 중재법 제17조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의 중재법에서는 이와 관련한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즉, 피신청인은 본안에 관한 답변서를 제출하기 전까지 선행요건의 불충족을 이유로 중재판정부가 해당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없다는 등의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이러한 경우 중재판정부는 이를 선결문제로 결정하거나 본안에 관한 중재판정에서 판단하여야 합니다. 또한 중재판정부가 이를 선결문제로 결정한 경우에는 당사자들은 법원에 중재판정부의 권한에 대해여 심사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나. 청구적격의 문제
반면, 중재개시의 선행요건 충족 여부를 청구적격의 문제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선행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더라도 중재판정부는 당해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있으며, 다만 선행요건이 충족되기 전에 신청인의 청구에 대한 검토 및 판단을 진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조건 미충족은 원칙적으로 치유 가능한 사항이고, 중재판정부는 통상 선행요건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중재절차를 진행하면 됩니다.
이 견해의 이론적 근거는 (i) 당사자들은 중재합의를 통하여 분쟁을 신속하고 종국적으로, 단일 판정부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을 의도했고, (ii) 선행조건 불충족을 관할권의 문제로 보는 경우에는 중재판정부의 권한에 관한 결정에 불복한 당사자가 법원에 심사를 신청하는 등 결국 분쟁해결의 지연만 초래될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당사자들의 의도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설들은 선행조건 불충족을 청구적격 문제라고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3
2. 중재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 관련 판례
가. 국제적인 트렌드
대체적으로 주요 중재지 국가들은 위 이슈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청구적격의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국가 | 주요 판례 |
영국 |
Republic of Sierra Leone v. SL Mining Ltd (2021)4 |
미국 | BG Group v. Republic of Argentina (2014)5 |
싱가포르 | BBA v. BAZ (2020); BTN v. BTP (2021)6 |
홍콩 | C v. D (2021)7 |
프랑스 | MCBA Holding v. HD Holding (2023)8 |
나. 법리가 정립되지 않은 다수 국가
중재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은 원칙적으로 청구적격의 문제라고 보는 국제적인 트렌드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거나 상충되는 판례들이 존재하는 등, 법리가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국가들도 다수 있습니다. 간략히 예를 들자면:
- 스위스의 경우 중재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은 관할권의 문제라는 취지의 판례들이 축적되고 있었으나,9 최근 청구적격의 문제라는 취지의 스포츠 중재판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해당 판정이 스포츠 중재에 한정된 것인지, 일반적인 중재에도 적용될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10
- 인도의 경우 중재개시의 선행조건에 대하여 여러 상이한 판례가 있어, 이를 관할권의 문제로 보는지 아니면 청구적격의 문제로 보는지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입니다.11
- 대한민국의 경우, 아직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 판례가 없습니다.
3. 시사점
기업이 중재신청을 고려하고 있으면, 다단계 분쟁해결 조항에 따라 사전에 거쳐야 할 선행절차가 있는지 검토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절차를 거쳐서 중재를 신청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하며, 만약 그러한 절차를 거치기 어렵거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중재를 신청할 것이라면 중재지 소재 국가나 중재판정에 대한 집행/승인을 신청할 국가에서 이를 관할권의 문제로 보는지 아니면 청구적격의 문제를 보는지도 미리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대한민국 등 관련 법리가 정립되지 않은 국가의 경우에는 국제적 트렌드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관련 법과 판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법원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지도 판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선행요건의 충족 여부를 원칙적으로 청구적격의 문제로 보는 국가라 하더라도 개별 사건마다 구체적인 중재합의의 내용과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당사자간에 분쟁이 발생하거나 분쟁 발생이 예상되고 있다면 기업으로서는 그러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안을 선택하여 대응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 내용에 관하여 궁금하신 사항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신 경우 언제든지 연락하여 주시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상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가령, White & Case와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가 2018년도에 진행한 International Arbitration Survey에 따르면, 922명의 중재 변호사, 중재인, 사내 변호사 중 48%가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분쟁해결 절차로 ‘국제중재’를, 49%가 ‘국제중재와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을 합친 다단계 절차’를 선택하였으나, 2021년도에 다시 진행된 International Arbitration Survey에 따르면 1,218명의 중재 변호사, 중재인, 사내 변호사 중 31%가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분쟁해결 절차로 ‘국제중재’를, 59%가 ‘국제중재와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을 합친 다단계 절차’를 선택하였습니다. Compare Paul Friedland and Stavros Brekoulakis, 2018 International Arbitration Survey: The Evolution of International Arbitration, p. 5 with Abby Smutny and Norah Gallagher, 2021 International Arbitration Survey: Adapting Arbitration to a Changing World, p. 5.
2 중재법 제36조 내지 제39조 참조.
3 Jan Paulsson, Jurisdiction and Admissibility, Global Reflections on International Law, Commerce and Dispute Resolution, Liber Amicorum in honour of Robert Briner (ICC Publishing 2005) 601, 615; Gary Born, International Commercial Arbitration, pp. 999-1000 (3rd ed. 2020) 등 참조.
4 Republic of Sierra Leone v SL Mining Ltd [2021] EWHC 286 (Comm) 및 NWA v NVF [2021] EWHC 2666 (Comm.) 참조. 2021년도 전까지 영국에서는 중재 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은 관할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한 판례들이 다수 있었으나, 영국 법원이 2021년도에 그 입장을 달리한 것입니다. Emirates Trading Agency LLC v. v Prime Mineral Exports Pte Ltd [2015] 1 WLR 1145; PAO Tatneft v Ukraine [2018] 1 WLR 5947; Obrascon Huarte Lain S.A. v Qatar Foundation for Education [2020] EWHC 1643 (Comm) 등 참조.
5 BG Group v. Republic of Argentina, 572 U.S. 25 (2014) 참조. 미국 역시 2014년도 전에는 중재 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은 관할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한 적도 있습니다. Dean Witter Reynolds, Inc. v. Howsam, 262 F.3d 956, 966 (10th Cir. 2001) (reversed) 등 참조.
6 BBA v BAZ [2020] 2 SLR 453 및 BTN and another v BTP and another [2021] 1 SLR 276 참조.
7 C v D [2021] HKCFI 1474 및 Kinli Civil Engineering v Geotech Engineering [2021] HKCFI 2503 참조.
8 No. 21-25.024 (Court de cassation, 1 February 2023) 참조. 해당 판례를 통해 프랑스 법원은 국제상사중재의 맥락에서 중재 개시의 선행조건 불충족은 청구적격의 문제라는 입장을 확인해주었으나, 그 전에도 주로 투자자중재의 맥락에서 프랑스 법원은 동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No. 15/03504 (Cour d’appel de Paris, 28 June 2016); No. 19-11.551 (Court de cassation, 31 March 2021); RG 18/27648 (Cour d’appel de Paris, 25 May 2021); RG 19/19834 (Cour d’appel de Paris, 28 September 2021); No. 21-15.390 (Court de cassation, 7 December 2022); No. 21-25.377 (Court de cassation, 17 May 2023) 등 참조.
9 Transport-en Handelsmaatschappij ‘Vekoma’ B.V. v. Maran Coal Corporation, Judgment of 17 August 1995, ASA Bulletin 1996, 673; No. 4A_46/2011, X GmbH v. Y Sàrl (Swiss Supreme Court, 16 May 2011); No. 4A_18/2007, X Ltd. v. Y (Swiss Supreme Court, 6 June 2007) 등 참조.
10 DFT 4A-287/2019 및 DFT 4A_413/2019, ASA Bull. 1/2020 참조.
11 BSNL v. Nortel Networks (India) (P) Ltd, 5 SCC 738 (2021); United India Insurance Co. Ltd. v. Hyundai Engg. and Construction Co. Ltd., 17 SCC 607 (2018); Demerara Distilleries (P) Ltd. v. Demerara Distillers Ltd., 13 SCC 610 (2015); S.K. Jain v. State of Haryana, 4 SCC 357 (2009)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