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사법재판소(ECJ)는 C-264/21 사건에서 상표가 부착된 제품에 결함이 있는 경우, 해당 제품에 표시된 상표의 상표권자는 자신이 제품을 제조하지 않은 경우에도 제조물 책임을 부담한다는 내용의 선결적 판단(preliminary ruling)을 하였습니다.  

본 사안은 이탈리아 회사인 Saeco International Group SpA(이하 “Saeco”)가 루마니아에서 제조한 커피머신에 대한 것입니다.  위 커피머신에 불이 붙어 구매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였으며, 보험회사는 구매자에게 손해를 배상한 뒤 구매자를 대위하여 Saeco의 모회사인 Koninklijke Philips(이하 “Philips”)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Philips는 네덜란드 회사로, 문제의 커피머신과 포장지에는 Philips가 등록한 상표인 ‘Philips’와 ‘Saeco’ 로고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해당 커피머신에는 CE 마크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Saeco의 로고, 이탈리아 주소, 'Made in Romania'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보험회사의 청구에 대해 Philips는 자신이 문제된 커피머신의 제조자(producer)가 아니라며 자신에 대한 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핀란드 1, 2심 법원은 서로 엇갈린 판단을 내렸습니다.  EU 제조물 책임 지침(Directive 85/374) 제3조 제1항은 제조자(producer)를 “완제품의 제조자, 원자재 생산자 또는 구성품의 제조자 및 제품에 이름, 상표 또는 기타 식별력 있는 특징을 표시함으로써 자신을 제조자로 표시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핀란드 대법원은 위 제조자(producer)의 개념과 관련하여 ECJ에 선결적 판단(preliminary ruling), 즉 위 EU 제조물 책임 지침(Directive 85/374) 제3조 제1항의 해석과 관련하여, 제품에 자신의 이름, 상표 또는 기타 식별력 있는 특징을 표시하거나 그러한 표시를 허락한 자가 위 규정의 ‘제조자’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제조자로 표시하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ECJ의 해석을 구하였습니다. 

ECJ는 이에 대하여, 제조물 책임 지침 제3조 제1항의 제조자(producer)란 “제품에 자신의 이름, 상표 또는 기타 구별되는 특징을 표시한 자 또는 이를 허락한 자”를 의미하고, 그러한 자는 그 외에 자신이 해당 제품의 제조자라는 점을 추가적으로 표시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Philips는 EU 제조물 책임 지침에 따라 책임이 있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Philips와 Saeco 사이의 내부적인 책임분담은 소비자와의 관계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ECJ는 이러한 판단의 이유로, 제조물 책임 지침(Directive 85/374) 제3조 제1항의 문언상 제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품 제조 과정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 상표권자는 당해 제조물에 자신의 상표가 표시되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당해 제품의 제조 과정에 관여하거나 그에 대해 책임을 부담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는 한편, 자기 상표의 명성을 이용해 상품을 매력적으로 만들게 되므로 그에 따른 대가로서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점, 소비자 입장에서는 상표를 부착한 사람이나 실제 상품을 제조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으므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가장 적절한 제조자’를 찾을 필요 없이 자신의 모든 손해를 누구에게든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위 판단은 자신의 상표를 제품에 부착하거나 다른 사람이 이를 부착하도록 허락한 경우, 자신이 그 제품을 제조하지 않았거나 또는 자신을 제조자로 표시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상품에 결함이 있다면 제조물 책임을 부담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위 사안에서 Philips는 문제된 커피머신을 제조한 사실이 없고 단지 자신의 상표인 ‘Philips' 상표를 커피머신에 부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을 뿐이지만, 제조물 책임 지침에 따른 책임을 부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어떤 면에서 보면 EU 제조물 책임 지침상으로 타인의 제조물에 자신의 상표가 표시되도록 허락한 상표권자도 제조물 책임을 부담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 판결의 진정한 의의는, 상표권자 외에 제조자를 특정할 수 있는 표시가 되어 있고, 따라서 소비자가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상표권자는 제조자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경우에도, 자신의 상표가 제조물에 표시되도록 허용한 상표권자는 당해 상표 외에 자신을 제조자로 오인되게 할 수 있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더라도 제조물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조물 책임법 역시 ‘제조물의 제조·가공 또는 수입을 업(業)으로 하는 자(가목)’ 외에 표시제조업자, 즉 ‘제조물에 성명·상호·상표 또는 그 밖에 식별(識別) 가능한 기호 등을 사용하여 자신을 가목의 자로 표시한 자’(소위 ‘표시제조업자’) 또는 ‘가목의 자로 오인(誤認)하게 할 수 있는 표시를 한 자’(소위 ‘오인표시제조업자’)를 모두 제조업자로 규정함으로써 실제 제품을 제조하는 자 외에 자신의 상표 등을 표시한 자도 제조물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 중 표시제조업자에 관한 규정은 EU 제조물 책임 지침 제3조 제1항과 매우 유사합니다.  위 ECJ 사건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이 결국 표시제조업자의 경우 EU 제조물 책임 지침에 따른 제조물 책임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제조물에 상표 등을 표시한 것 외에 제조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별도의 표시행위가 필요한지 여부인데, 그러한 해석상 쟁점은 유사한 규정을 두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 제조물 책임 법제 하에서도 ECJ와 같은 해석론을 택한다면, 상표권자는 제조자가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 아니하거나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제조자인 것처럼 오인할 수 있는 표시를 한 경우에만 표시제조업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제조자 표시가 되어 있어 실제 제조자가 누구인지 확인이 가능한 경우에도 제조물 책임을 부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제조물 책임법도 위 ECJ의 선결적 판단과 동일한 취지로 해석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려운 이상, 상표권자로서는 자신의 상표에 대해 사용권을 부여하는 경우 해당 상표사용자와의 관계에서 제조물 책임에 관한 면책 규정을 두는 등의 조치를 취해 둘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상표 사용허락 대상 제품에 관하여 별도로 제조물 책임보험에 가입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내부적 책임 분담 규정을 둔 경우에도, 위 ECJ 판결에 의하면 소비자와의 관계에서는 상표권자가 여전히 전체 손해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함께 유의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