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다수의 채무 중 변제를 충당하여야 할 채무를 지정하지 않고 모든 채무를 변제하기에 부족한 금액을 변제한 경우, 남아있는 소멸시효기간이 긴 채무가 언제나 채무자에게 변제이익이 더 많다고 볼 수 없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든 채무에 대한 승인으로서 소멸시효를 중단시키는 효력이 있다고 판단한 사례
1. 사안의 개요
원고는 피고에게 장기간 수회에 걸쳐 사업자금 명목으로 금전을 대여하여, 양자 사이에는 소멸시효기간이 모두 동일한 다수의 차용금채무가 존재하게 되었음. 피고는 그 채무의 일부를 계속 변제하였는데, 일정 시점까지는 특정 채무를 지정하여 변제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충당할 채무를 지정하지 않은 채 변제를 계속하였음.
대여금이 잔존한 상황에서 원고는 (i) 주위적으로 대여금 반환을, (ii) 예비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원인으로 한 대여계약 해제에 따른 원상회복을 구함.
이에 대해 피고는 주위적 청구에 대해서 지정충당 및 합의충당에 관한 증거가 없는 변제액은 소멸시효기간이 많이 남은 가장 최근에 성립한 채권부터 변제에 충당되므로, 원고에 대하여 먼저 성립한 일부 채권들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하였다고 항변하였고, 예비적 청구에 대해서는 채무불이행 사실이 없다고 항변함.
2. 원심의 판단
원심은 원고의 주위적 청구와 관련하여, (ⅰ) 피고의 변제액 중 일부에 관해서는 피고가 특정 채무를 지정하여 변제한 것이라고 보아 해당 채무의 변제에 충당되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고, (ⅱ) 지정충당이 인정되지 않는 나머지 변제액에 관해서는 소멸시효가 나중에 완성되는 채무가 변제이익이 많다고 보아 위 변제액이 민법 제477조 제2호에 따라 가장 최근에 성립한 채무에 우선 충당되었다고 판단함. 그리고 위 일부 변제로는 원고에 대하여 먼저 성립한 일부 채무들의 소멸시효가 중단되지 않았다며, 해당 일부 채무들에 대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고 원고의 청구를 인용함. 한편 원심은 원고의 예비적 청구와 관련하여 피고의 채무불이행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기각함.
3. 대법원의 판단 : 주위적 청구 부분 파기 환송, 나머지 상고기각
(1) 법정변제충당의 순서
채무자가 부담하는 수개의 채무의 소멸시효기간이 모두 동일한 경우에는 소멸시효의 중단, 정지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행기가 먼저 도래하는 채무가 시효도 먼저 완성됨. 그런데 민법 제477조가 제2호에서 변제이익을, 제3호에서 이행기를 기준으로 법정변제충당의 순서를 정한다고 별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문언상 이행기 선후에 따라 변제이익이 달라지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 또한 시효 중단·포기 등 사후적 사정에 따라 시효완성 여부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남은 시효기간이 긴 채무가 언제나 채무자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없음.
따라서 동일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수의 채무의 소멸시효기간이 모두 동일한 경우 이행기가 나중에 도래하는, 즉 남은 시효 기간이 긴 채무의 변제이익이 반드시 크다고 볼 수 없음. 그럼에도 원심은 단순히 남은 시효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충당할 채무를 지정하지 않은 변제액이 가장 최근에 성립한 채무에 우선 충당된다고 보았으므로, 이러한 원심에는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음.
(2) 일부변제와 채무승인에 의한 시효중단(파기)
동일 채권자·채무자 사이에 다수의 채권이 있는 경우, 채무자가 충당할 채무를 지정하지 않고 전부 변제에 부족한 금액을 변제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변제는 모든 채무에 대한 승인으로서 소멸시효를 중단시킴(대법원 2021. 9. 30. 선고 2021다239745 판결).
채무자는 자신이 당사자인 다수 계약상 채무의 존재를 통상 인식하므로, 지정 없이 변제하였다면 그 전부의 존재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임.
이 사건에서 피고의 일부변제 역시 당시 남아 있던 모든 채무에 대한 승인으로서 시효중단 효력이 있음에도 이를 부정한 원심에는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음.
4. 대상 판결의 의의 및 시사점
대상판결은 민법 제477조 제2호(변제이익)와 제3호(이행기)가 독립된 요건임을 명확히 하였음. 즉, 소멸시효기간이 동일한 다수 채무에서 "이행기가 늦다(남은 시효기간이 길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변제이익이 크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데 의의가 있음.
또한 대상 판결은 채무자가 충당할 채무를 지정하지 않고 한 일부변제는, 명시적으로 특정 채무액을 다투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당시 존재하는 모든 채무에 대한 포괄적 승인으로 작용하여 소멸시효를 중단시킨다는 점을 재확인하였음.
따라서 채권자인 금융기관의 입장에서는, 동일 채무자에 대한 다수의 채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충당 지정 없는 일부변제가 이루어진 경우, 변제이익이 동일하다면 민법 제477조 제3호에 따라 이행기가 먼저 도래하는 채무부터 충당됨을 적극적으로 원용하여 잔존 채권을 산정할 수 있을 것임.
채무자 입장에서는, 충당 지정 없이 일부만 변제하면 의도와 무관하게 채무 전부를 승인한 것으로 평가되어 시효이익을 상실할 수 있으므로, 시효완성이 임박한 채무가 있으면 변제 시 충당 대상을 명확히 지정하여 그 의사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필요함.



